마주하다 – 황효실 초대전

2021.05.27. – 2021.06.08

Hwang, Hyosil
마주하다
황효실 초대전

황효실 개인전 평문

바다를 바라보고, 서로 마주하다.
허나영(미술비평)

저 멀리 하늘과 바다가 만난 수평선을 바라본다. 그 수평선을 기준으로 아래로는 잔잔한 물결이 움직이며 나에게 파도가 되어 다가온다. 그리고 위로는 아스라한 하늘이 펼쳐진다. 수평선으로 맞닿은 바다와 하늘은 그저 하나의 색 면인 듯 고요히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삶과 죽음이 켜켜이 쌓여 있다. 세세한 생명과 크고 작은 사건을 모두 알지는 못해도, 잔잔한 색면은 그저 미동이 없는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움직임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기 전 잠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볼 때에도 창가에 앉아 다른 생각에 빠졌을 때에도, 겉으로 보기에는 큰 사건은 없지만 그 순간에도 수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는 사유와 움직임을 멈추기 위한 명상과 수행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명상의 과정은 잠시 삶의 흐름에서 빠져나오게 해서 몸과 마음을 휴식하게 하는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명상의 순간을 황효실의 바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바다를 바라보다.
황효실은 2013년경부터 바다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산과 물이 있는 산수(山水)를 구체적인 장소의 사실적인 모습을 기반으로 표현했다면, 이 시기부터는 바다와 그 위의 돌섬을 주로 그리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산수를 그렸을 때처럼 실경(實景)을 기반으로 했지만, 점차 여행 이후 기억과 마음에 남은 잔상을 화폭에 배치하였다. 이에 대해 황효실은 “그 자체에서 산수를 체험하는 나를 의식하는 단계로, 다시 나의 심경이 투영된 제3의 자연인 ‘의경(意景)’ 표출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면서, 점차 자신의 심리적 공간을 표현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표현의 대상으로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에서 점차 자신으로 그 시선을 옮겨온 것이다. 이는 실제 경치를 사실적으로 옮기는 풍경화가 아니라, 작가의 주관적 심상에 따라 표현되는 것으로 동양의 전통 회화의 관점과도 맥이 연결된다. 그저 자연을 객관적 대상으로만 두고 이에 대해 분석하듯이 합리적인 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을 직접 바라보면서 겪고 느낀 작가만의 심리적인 풍경을 화폭에 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림 속 공간은 실제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이다. 그렇지만 분명 작가의 주관적 관점에서 포착되었고 바라본 세상에 대한 모습이다.
이렇듯 황효실은 세상을 자신의 방식대로 바라보고 이해하여 이를 그림에 담았다, 그래서 바다에서 보았던 바위섬이 그림 속 바다에 있지만, 그곳은 실제 지리적 위치와는 상관없이 그저 그림 위 바다에 놓여있다. 그리고 바다가 하늘과 맞닿는 수평선은 어떤 그림에서는 아래에, 또 다른 그림에서는 위에 위치하는 등 조금씩 다른 선상에 놓여있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가 둥글기에 그 수평선이 바다의 끝이 아닐 것이기데 그 선이 바다의 끝은 아니다. 또한 바다의 양끝 역시 화폭 밖으로 무한히 확장된다. 그렇기에 황효실의 화폭 속 바다는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이다. 마치 실제 바다의 끝없는 광활함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거대한 바다가 가지는 숭고함이나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심오함이 드러나진 않는다. 그보다는 그저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처럼,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될 것 같은 망망대해와 같다. 그렇지만 황효실이 그린 그 바다에는 돌섬도 떠있고, 바다의 잔물결도 일렁인다.

잔물결이 모여 결을 이루다.
황효실은 산수에서 그랬듯, 돌섬의 바윗결과 그 위에 자라난 잡목과 풀을 세밀한 붓질로 묘사했다. 하지만 점차 그 붓질은 바다의 잔물결로 내려앉았다. 바다가 그저 평평한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에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가 있고 수많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바로 그 잔물결들이다. 이를 한국화 기법에서 연유한 세밀한 선의 반복으로 표현하면서, 황효실은 마치 자신이 수행하는 듯 명상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세상의 고민과 일들을 잠시 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 그어진 선들은 어느 정도의 시간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어떠한 결을 이루었다. 결들은 작가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만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시간의 결과인 것이다.
더 나아가 황효실은 그 선들을 보다 일정한 간격으로 확장해보고자 하였다. 짧은 선으로 표현한 바다의 잔물결을 확장하여, 수평선에 평행하면서 일정한 간격을 가진 선들을 그었다. 이 선들 역시 기계적인 움직임이 아닌 작가의 행위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바다 표면의 확장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수평선을 더 모호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가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되는 지가 명확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화면의 평면성은 두드러지고  더욱 단순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선이 그어진 평면은 이전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길 가능성을 갖게 된다.
실상 우리는 바닷가에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면, 저 멀리를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황효실 작품 속 바다에서는 화면에 그은 선을 통해, 하늘과 바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성이 형성된다. 도가나 현상학, 생태학 등에서 이야기하는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과도 연결될 수 있다. 인간만이 의지를 가진 주체로 자연을 마구잡이로 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생명과 사물은 그물망과 같이 얽혀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의 시각화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황효실의 그림 속 하늘과 바다는 그저 우리가 관조하는 대상이 아니라 수평선을 통해 마치 파도처럼 우리에게로 밀려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작가가 제시한 제목처럼, 우리와 바다는 서로 ‘마주한다.’

결국, 서로 마주하다
황효실은 자신과 마주한 바다에 감정을 녹여내어 하늘과 맞닿아있는 바다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저 거대하기만 한 바다가 아닌, 파도에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는 바위 섬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한 마리의 종이학을 놓았다.
종이학은 바다 위 바위섬에 위태롭게 서 있기도 하고, 파도에 밀려와 뒹굴기도 한다. 물에 쉬이 젖어버리고 스스로 날지 못하는 종이학이기에, 어쩌면 파도가 치고 예상하기 힘든 바다 앞에서 한없이 약한 존재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언젠가 종이학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더 단단해지고, 그러다 하늘로 높이 날아올랐으면 하는 소망을 작가는 담았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풍파 속에서, 비록 종이학처럼 연약할지라도 언젠가는 다른 새들처럼 자유롭게 날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꾸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꿈과 달리 현실 속 감정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그러한 점이 무의식적으로 근작의 회색 바다에서 드러난 것일지 모른다. 황효실은 푸른색으로 밑색을 칠하면서 시작했던 바다가 겨울 바다에서 느꼈던 감정을 떠올리며 작업하다 보니 점차 무채색으로 덮여갔다고 한다. 명상을 하듯 그었던 파도의 잔물결들이 결을 이루었던 것처럼, 무채색의 바다 역시 작가도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떠한 감정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겨울바다가 작가에게 들려준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인적이 드문 산이나 강, 바다에서 자연의 소리를 듣고 빛을 느끼면, 예상치 않은 치유를 받게 되기도 한다. 자연은 우리가 누구인지, 과거에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 판단하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며, 그 모습 그대로로 우리를 바라봐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저 수용하고 받아주는 자연의 모습은 우리를 잠시나마 쉴 수 있게 해주고 아픈 감정들을 내려놓고 내일을 다시 살 수 있게 한다.
황효실이 표현한 바다 역시 그렇다. 끝없는 바다를 바라볼 때처럼, 수평으로 놓여있는 바다와 마주하면서 잠시나마 명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수행하듯 그은 바다의 잔물결을 바라보며 우리 역시 일상의 작은 쉼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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